정규완의 성공병법 : 서론


정규완의 성공병법


‘행복’과 ‘성공’은 동의어가 아니다. 그러나, 이 둘은 어떤 유의미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꿈꾼다. ‘모든’이라고 단정짓는 것이 방자하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꿈꾼다.’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복을 꿈꾼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사람들마다 느끼는 ‘행복’이라는 것을 명확히 정의내리기도 쉽지 않거니와, ‘행복’이라는 상태가 심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것이어서 ‘행복’을 느끼는 당사자들조차도 ‘행복’을 명확히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에는 어느 정도의 공통점들이 자리잡고 있다. 예를 들어, 고대의 노예처럼 가죽채찍으로 몸을 맞는 상태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사랑하는 두 남녀가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이제 막 신혼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보통 이러한 상태를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하는데 이견(異見)이 없을 것이다.



즉, ‘행복’에 대해서 명확히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행복’에 대해서 일반적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사회적으로 합의된 정의를 가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 삶을 산다.



그렇다면, ‘행복’과 ‘성공’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성공’ 역시 사람들마다 정의하는 바가 다르다. 그리고, 같은 사람이라 할 지라도 나이 때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정의하는 ‘성공’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성공’ 역시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정의를 가진다.(‘행복’의 사회적으로 합의된 정도와 ‘성공’의 사회적으로 합의된 정도 중에서 어느 것이 정도가 높은지에 대해서는 학문적인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 2017년 대한민국에서 지속적으로 흑자가 나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면서, 몸이 건강하고, 가족이 평안하며, 재산이 200억대 정도가 되는 남성(a)을 보면 일반적 사람들은 ‘성공’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재산이 20조원이 거부인 남성(b)가 남성(a)를 봤을 때, ‘성공’한 것이 아니라고 평가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반적 사람들이 봤을 때 남성(a) 정도면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아마 위의 남성(a)는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일반적 사람들도 남성(a)를 보면서 ‘행복할 것이다.’라고 추정할 것이다. 그러나, 위의 남성(a)가 행복하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위의 위의 남성(a)는 어릴 때부터 너무너무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가업(家業)을 이어야 해서 자기와 의사에 반해서 거의 강제로 사업을 떠맡게 되었고 아직 사업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해서 시(詩)를 쓸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는 사업적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그 ‘일’이 줄어들기는 커녕 자꾸만 쌓여가는 상황에 남성(a)가 처해 있다면 ‘행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반대의 예를 들어보자. 사업에서 번번히 실패를 하고, 사기까지 당해서 일생 동안 모아 놓은 전재산을 잃고 노숙자 생활을 3년 째 하고 있는 2017년 5월 대한민국의 50대 남성(d)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아마 이 남성(d)에 대해서 일반적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사실, ‘성공’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칭찬이기 때문에, 흔쾌히 말할 수 있는 것인 반면에, 어떤 사람을 ‘성공’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그 평가받는 사람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흔쾌히’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남성(d)를 평가하는 사람(c)가 ‘남성(d)’처럼 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마음 속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마음 먹는 것이 남성(d)를 ‘성공’하지 못한 사람으로 평가한 간접적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혹은 사람(c)가 자기 자녀에게 열심히 노력해서 남성(d)처럼은 되지 말아야 겠지 않냐고 말할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이처럼 ‘성공’에 대해서 일반적 사람들이 느끼는 어느 정도로 합의된 사회적 ‘정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 위의 남성(d)는 ‘행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꽤 있다. 그리고 일반적 사람들도 남성(d)를 보면서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일정 부분 추정할 것이다. 그러나, 남성(d)가 노숙자 생활을 통해서 그 동안 현실에 치여 사느라고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따스한 인간미에 대한 고마움을 살포시 느끼면서,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맙고 감사할 일인가를 새삼 느끼면서, 노숙인들에게 봉사하는 자원봉사자 분들이 주시는 따뜻한 밥을 먹으며 ‘사람이란 존재가 이렇게 고맙고 아름답구’나 하고 사무치게 느끼면서, ‘나도 다시 한 번 마음을 잡고 낮은 자세로 열심히 노력하면 이 노숙자 생활을 벗어날 수 있겠다!’라고 희망찬 마음을 먹으며 ‘행복’을 느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성공’과 ‘행복’은 분명 어느 정도의 비례성을 가지나, 때때로 ‘성공’과 ‘행복’의 상황이 비례하지 않고 괴리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인간 사회를 살펴보면 ‘성공’과 ‘행복’은 상당히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즉, ‘성공’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느끼거나 평가하게 되며,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 ‘행복’하지 않거나 덜 ‘행복’하다고 느끼거나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위해서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 ‘성공’이 그들에게 더 높은 ‘행복’의 상태로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기 때문에 ‘성공’을 위하여 기꺼이 ‘노력’하고, ‘시간 투자’하고 ‘고생’하는 것 아닐까? ‘성공’이 어느 정도의 ‘행복’을 보장한다고 믿기 때문에 ‘성공’하기 위하여 열심히 사는 것이며,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면 ‘행복’하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직간접적 증거가 되는 것이다.



※ 이 사이트에서 서술된 모든 내용은 사회학적, 인문학적인 연구를 통해서, 검증을 받을 여지(餘地)가 있다. 그러나, 이 사이트에서 서술된 모든 내용은 필자가 심혈을 기울여서 사색하고 경험한 것들의 총합(總合)으로서 객관적 서술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필자 본인의 주관적 주장이 들어가게 되는 것은 글쓰기의 본성상 불가피하다고 할 것이다. 이 글들은 학문적인 논문(論文)이 아니며, 필자가 주장하는 내용을 담은 논설문(persuasive essay)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포스트의 주해

댓글

(0/300)

댓글 56

답글 등록


(0/300)


댓글 삭제



댓글 수정


(0/300)